
마취하면 왜 아프지 않을까?
들어가며: 수술대 위에서의 기적
혹시 수술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몇 년 전 치과에서 사랑니를 뽑을 때 처음으로 본격적인 마취를 경험했습니다. 주사를 맞는 순간 살짝 따끔했지만, 그 이후로는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제 입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마취가 뭐길래 이렇게 신기한 일이 가능한 걸까?'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마취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 몸에서 통증을 차단하는지, 그 과학적 원리를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취란 무엇인가요?
마취(麻醉)라는 단어는 한자로 '저리다'는 뜻의 '마(麻)'와 '취하다'는 뜻의 '취(醉)'가 합쳐진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감각이 둔해지거나 의식이 흐려지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의학적으로는 약물을 사용하여 일시적으로 의식, 감각, 운동 및 반사작용을 차단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마취가 '가역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취 효과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는 뜻이에요. 만약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건 마취가 아니라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되겠죠. 그래서 마취과 의사들은 환자가 안전하게 마취 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세심하게 관리합니다.
2. 먼저 통증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마취가 어떻게 통증을 없애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통증이 어떻게 발생하고 우리 몸에서 전달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통증은 어떻게 느껴질까요?
손가락을 뜨거운 냄비에 실수로 대면 어떻게 될까요? 순간적으로 "앗, 뜨거!" 하면서 손을 떼게 되죠. 이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 몸에서는 굉장히 복잡한 일이 벌어집니다.
먼저, 피부에 있는 통증 수용체(통각수용체)가 뜨거움이라는 자극을 감지합니다. 이 수용체들은 일종의 센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센서가 위험 신호를 감지하면, 그 정보를 전기 신호로 바꿔서 신경을 통해 척수로 보냅니다.
척수에 도착한 신호는 두 가지 경로로 나뉘어요. 하나는 곧바로 운동 신경으로 가서 반사 반응을 일으키고(그래서 생각하기도 전에 손을 떼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뇌로 올라가서 "아프다"는 감각으로 인식됩니다.
신경 신호는 어떻게 전달될까요?
신경 세포(뉴런)는 전기 신호를 통해 정보를 전달합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온 채널'입니다. 특히 나트륨 채널이 중요한데요, 신경 세포가 자극을 받으면 나트륨 채널이 열리고, 나트륨 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어오면서 전기 신호가 만들어집니다. 이 신호가 도미노처럼 연속적으로 전달되면서 통증 정보가 뇌까지 도달하게 되는 거예요.
쉽게 비유하자면, 신경은 전화선 같은 것이고, 통증 신호는 그 전화선을 타고 전달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취는 바로 이 전화선을 일시적으로 끊거나, 뇌에서 메시지를 받아도 해석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3. 마취의 종류: 국소 마취와 전신 마취
마취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국소 마취와 전신 마취인데요, 각각 작동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국소 마취: 특정 부위의 감각만 차단하기
국소 마취는 이름 그대로 '국소', 즉 몸의 특정 부위에만 마취를 거는 방법입니다. 치과에서 이를 뽑을 때 맞는 주사가 대표적인 예시죠. 국소 마취를 하면 의식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해당 부위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국소 마취제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국소 마취제의 핵심 원리는 신경 세포의 나트륨 채널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트륨 채널이 열려야 전기 신호가 만들어지고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소 마취제가 이 채널을 막아버리면, 나트륨 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결국 전기 신호 자체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전화선의 중간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저쪽에서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도, 중간에 끊겨버리면 이쪽에서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죠. 그래서 통증이 분명히 발생하고 있어도, 그 신호가 뇌에 도달하지 못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국소 마취를 할 때 감각이 사라지는 순서가 있습니다. 보통 통각(아픈 감각)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그다음이 온도 감각, 그다음이 촉각, 그리고 운동 기능이 가장 마지막에 마비됩니다. 이건 신경 섬유의 굵기와 관련이 있는데요, 가는 신경일수록 마취제에 더 빨리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치과에서 마취를 맞으면 아픈 건 안 느껴지는데, 뭔가 누르는 느낌은 살짝 남아있는 경우가 있는 거예요.
국소 마취의 종류
국소 마취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표면 마취: 크림이나 스프레이 형태로 피부나 점막 표면에 바르는 방식입니다. 내시경 검사를 하기 전에 목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게 바로 이 방법이에요.
- 침윤 마취: 마취하고 싶은 부위의 피부 아래에 직접 주사하는 방법입니다. 치과에서 잇몸에 주사하는 게 대표적이죠.
- 신경 차단 마취: 특정 신경 근처에 마취제를 주사해서, 그 신경이 담당하는 전체 영역을 마비시키는 방법입니다.
- 척추 마취와 경막외 마취: 척수 주변에 마취제를 주입해서 하반신 전체를 마비시키는 방법입니다. 무통 분만이나 하반신 수술에 많이 사용됩니다.
전신 마취: 의식 자체를 꺼버리기
전신 마취는 국소 마취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사용합니다. 특정 부위의 감각만 없애는 게 아니라, 아예 의식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쉽게 말해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것인데, 일반적인 수면보다 훨씬 더 깊은 상태입니다.
전신 마취제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전신 마취제의 작용 원리는 국소 마취제와 다릅니다. 전신 마취제는 주로 뇌에 작용하는데요, 핵심은 'GABA(가바)'라는 신경전달물질입니다.
GABA는 뇌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입니다. 뇌의 신경 세포들이 너무 흥분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기능을 하죠. 전신 마취제는 이 GABA의 작용을 강화시킵니다. 그러면 뇌 전체가 억제되면서 의식이 사라지고, 통증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마취제도 있습니다. 'NMDA 수용체'라는 것을 억제하는 방법인데요, NMDA 수용체는 뇌에서 흥분성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걸 억제하면 뇌의 활동이 전반적으로 줄어들면서 마취 효과가 나타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신 마취의 정확한 작용 기전은 아직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이 여전히 연구 중인 분야예요. 분명한 건, 전신 마취제가 뇌의 여러 부위에 동시에 작용해서 의식, 기억, 통증 인식을 모두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전신 마취의 4가지 목표
전신 마취를 할 때 마취과 의사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 의식 상실: 환자가 수술 중에 깨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 무통(진통):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 기억 상실: 수술 중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합니다.
- 근육 이완: 수술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근육을 이완시킵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달성하기 위해 보통 여러 종류의 약물을 함께 사용합니다. 하나의 약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면 너무 많은 양이 필요해서 위험할 수 있거든요.
4. 마취의 역사: 고통에서 해방되기까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마취이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마취 없이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의식이 멀쩡한 상태에서 배를 가르거나 팔다리를 잘라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취 이전의 수술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수술은 그야말로 고문에 가까웠습니다.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술에 취하게 하거나, 경동맥을 눌러 기절시키거나, 심지어 둔기로 머리를 때려 실신시키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수술 중 쇼크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고, 환자들은 수술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외과 의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속도'였습니다. 환자가 고통받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수술을 끝내야 했거든요. 어떤 유명한 외과 의사는 다리 절단 수술을 불과 몇 분 만에 끝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에테르의 발견
현대적인 마취의 역사는 1846년 10월 16일,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시작됩니다. 치과 의사 윌리엄 모튼(William Morton)이 에테르를 사용한 마취 시연을 공개적으로 성공시킨 날이에요.
사실 에테르의 마취 효과는 그 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에테르 증기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몽롱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에테르 파티'가 유행하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의료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모튼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모튼은 자신이 발명한 장치로 환자에게 에테르를 흡입시켰고, 환자가 잠들자 외과의사 존 워렌이 환자의 턱에 있는 종양을 제거했습니다. 환자는 수술 중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고, 수술이 끝난 뒤 깨어났을 때도 멀쩡했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왔던 수술의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을 목격한 거니까요.
이 날은 현재까지도 '에테르의 날(Ether Day)'로 기념되고 있으며, 그 수술실은 '에테르 돔(Ether Dome)'이라는 이름의 사적지가 되었습니다.
마취제의 발전
에테르 이후로 더 나은 마취제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에테르에는 폭발 위험성이 있고, 환자에게 구토를 유발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거든요.
스코틀랜드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심프슨(James Young Simpson)은 클로로포름의 마취 효과를 발견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저녁 식사에 초대한 손님들과 함께 클로로포름을 흡입하는 실험을 했다가, 모두 마룻바닥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린 뒤 그는 이것이 훌륭한 마취제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곧바로 무통 분만에 적용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1853년 여덟 번째 아이를 낳을 때 클로로포름을 사용한 것이 알려지면서, 마취에 대한 사회적 저항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마취제는 계속 발전했습니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물들이 개발되었고, 오늘날에는 프로포폴, 세보플루레인, 데스플루레인 같은 현대적인 마취제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5. 통증은 왜 존재할까요?
잠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까요? 통증이 이렇게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건데, 왜 우리 몸에는 통증이라는 감각이 있는 걸까요? 그냥 없으면 안 될까요?
통증은 생존을 위한 경고 시스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통증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경고 시스템입니다.
뜨거운 냄비에 손을 댔을 때 통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손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걸 모르고 계속 잡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발에 못이 박혔는데 통증이 없다면? 감염이 퍼져서 심각한 상태가 될 때까지 모를 수도 있죠.
실제로 선천성 무통증이라는 희귀 질환이 있습니다. 이 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얼핏 보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위험합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의 혀나 손가락을 깨물어 손상시키거나, 골절이 있어도 모르고 걸어 다니다가 더 큰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증은 치유의 시작입니다
통증은 단순히 "아프다"는 신호만 보내는 게 아닙니다. 통증이 있으면 우리는 그 부위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삐끗한 발목을 가만히 두고, 상처 난 손을 조심히 사용하죠. 이런 행동들이 자연스러운 치유를 돕습니다.
또한 통증은 우리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기도 합니다. 배가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맹장염이었다는 경우, 그 통증 덕분에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6. 마취에 대한 흔한 오해들
마취에 대해 많은 분들이 가지고 계신 오해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정리해 드릴게요.
"마취하면 머리가 나빠진다?"
많은 분들이 전신 마취를 하면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머리가 나빠질까 걱정하십니다. 일반적인 건강한 성인의 경우, 마취로 인해 영구적인 인지 기능 저하가 생긴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수술 직후에 일시적으로 멍한 느낌이 들거나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건 마취제가 아직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회복됩니다.
고령 환자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기존에 치매 등의 위험이 있는 분들은 수술 후 일시적인 인지 기능 저하를 경험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 중입니다.
"마취에서 깨면 엄청 아프다?"
전신 마취에서 깨어날 때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사실 이건 마취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술 부위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그런 겁니다.
마취 상태에서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마취가 풀리면 수술로 인한 조직 손상에서 오는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수술 후에는 별도로 진통제를 사용해서 통증을 관리합니다.
"수면 마취와 전신 마취는 같은 건가요?"
흔히 "수면 마취"라고 부르는 것과 전신 마취는 다릅니다. 수면 마취(정확히는 진정 마취)는 의식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반쯤 잠든 것 같은 편안한 상태를 만드는 겁니다. 내시경 검사를 할 때 많이 사용하죠.
전신 마취는 완전히 의식을 없애고, 자발적 호흡도 억제되기 때문에 인공호흡을 해야 합니다. 훨씬 더 깊고 철저한 마취 상태입니다.
7. 마취, 현대 의학의 숨은 영웅
마취의 발전이 없었다면 현대 의학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심장 이식, 뇌 수술, 암 제거... 이런 복잡하고 긴 수술들은 마취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마취통증의학은 단순히 환자를 재우는 것 이상의 일을 합니다. 수술 중 환자의 활력 징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혈압, 심박수, 산소 포화도 등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며, 필요에 따라 약물을 조절합니다. 그야말로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인 셈이죠.
마치며: 작은 주사 하나에 담긴 거대한 과학
치과에서 맞는 작은 마취 주사 하나, 수술 전에 맞는 정맥 주사 하나. 이 간단해 보이는 행위 뒤에는 수백 년에 걸친 과학적 발견과 연구가 담겨 있습니다.
나트륨 채널을 차단하는 국소 마취제, GABA 수용체에 작용하는 전신 마취제, 그리고 통증이라는 감각이 어떻게 우리 몸에서 전달되는지에 대한 신경과학적 이해.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우리는 오늘날 고통 없는 수술이라는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음에 치과에 가시거나 수술을 받게 되실 때, 마취 주사를 맞으면서 이 글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그 작은 주사 안에 담긴 거대한 과학의 이야기를요.
아프지 않게 해주는 마취. 정말 고마운 존재 아닌가요?
참고 자료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 MSD 매뉴얼 - 통증 개요
- 대한마취통증의학회 자료
- Nature Neuroscience 연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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