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심장부 탐험: 특이점 너머, 양자 중력과 정보의 미스터리
1. 서론: 궁극의 미지, 블랙홀 속으로 - 우리의 호기심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우주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블랙홀만큼 우리의 상상력과 지적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대상은 드뭅니다. 블랙홀은 중력이 너무나도 강해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의 영역으로 정의됩니다. 이름 그대로, 그 내부는 완벽한 어둠에 싸여 있으며, 현재 인류의 지식으로는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궁극의 미지 영역입니다. 과연 이 검은 장막 뒤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요?
블랙홀의 존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Relativity, GR)이라는 위대한 이론적 성취로부터 예측되었습니다. 이 이론은 중력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하며, 블랙홀은 그 휘어짐이 극단에 달한 결과물입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수많은 관측과 실험을 통해 그 정확성이 입증되었고, 블랙홀의 외부 구조와 현상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해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일반 상대성 이론은 블랙홀의 가장 깊은 곳, 즉 중심부에서는 스스로의 붕괴를 예측합니다. 이론에 따르면 블랙홀 중심에는 '특이점(singularity)'이라는, 밀도와 시공간 곡률이 무한대가 되는 지점이 존재합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며, 일반 상대성 이론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블랙홀이 양자 역학적 효과로 인해 서서히 증발하며 정보를 소멸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정보 역설(information paradox)'은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둥인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 QM)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드러냅니다. 정보는 정말 사라질 수 있는 걸까요?
이처럼 블랙홀은 단순한 천문학적 관측 대상을 넘어, 기존 물리학의 근본적인 불일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자연의 거대한 실험실과 같습니다. 블랙홀 내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단순히 '저 안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은 무엇인가?', '중력과 양자 역학은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라는 심오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블랙홀 연구는 자연의 근본 법칙과 우주 진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열쇠입니다.
이 글은 최신 과학 연구와 논문들을 바탕으로 블랙홀 내부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입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그리는 블랙홀의 모습부터 시작하여, 특이점이라는 난관과 양자 중력 이론의 필요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더 나아가 끈 이론, 루프 양자 중력과 같은 양자 중력 후보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블랙홀 내부 모습과 정보 역설을 해결하려는 최신 시도들, 그리고 웜홀과 같은 흥미로운 가능성까지 깊이 있게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이 여정을 통해 독자 여러분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현대 물리학이 마주한 가장 큰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준비되셨나요? 블랙홀의 심장부로 함께 떠나봅시다!
2.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예측: 사건의 지평선과 특이점 - 경계 너머의 세계
일반 상대성 이론은 블랙홀이라는 극단적인 천체의 존재를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사건의 지평선'과 '특이점'이라는 개념은 블랙홀을 정의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2.1. 블랙홀의 탄생: 별의 장엄한 최후
블랙홀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가장 잘 알려진 시나리오는 거대한 별의 죽음입니다. 태양보다 훨씬 무거운 별들은 중심부에서 수소, 헬륨 등을 핵융합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이 에너지는 별 자체의 거대한 중력에 맞서 별이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별이 수명을 다하고 중심부의 핵융합 연료가 고갈되면, 더 이상 중력에 대항할 에너지를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별의 내부 압력은 자체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급격한 중력 붕괴(gravitational collapse)를 시작합니다. 별의 외부 층은 초신성(supernova)이라는 장엄한 폭발을 통해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지만, 중심부에는 매우 밀도가 높은 핵이 남게 됩니다.
만약 남겨진 중심핵의 질량이 충분히 크다면 (대략 태양 질량의 3-4배 이상, 이를 '톨먼-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라고 합니다), 중성자들이 서로 밀어내는 힘인 '중성자 축퇴압'마저도 중력 붕괴를 막을 수 없습니다. 현재 알려진 어떤 물리적 메커니즘도 이 엄청난 수축을 멈출 수 없으며, 별의 모든 질량은 결국 한 점으로 끝없이 붕괴하여 블랙홀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별의 중력 붕괴로 형성된 블랙홀을 '항성 질량 블랙홀(stellar-mass black hole)'이라고 부릅니다.
블랙홀 형성에는 다른 가능성들도 제기됩니다. 우주 초기의 특별한 조건에서 거대 가스 구름이 직접 붕괴하여 태양 질량의 수십만 배에 달하는 블랙홀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으며, 이는 은하 중심부에서 발견되는 초거대 질량 블랙홀(supermassive black hole)의 씨앗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지의 암흑물질 자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블랙홀이 형성될 수도 있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최근의 이론 연구들은 중력 붕괴 외에도 강력한 복사 에너지의 집중이나 초기 우주의 양자 요동 등 다양한 블랙홀 형성 메커니즘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2.2. 돌아올 수 없는 경계: 사건의 지평선
블랙홀의 가장 유명하고 본질적인 특징은 바로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입니다. 이는 블랙홀을 블랙홀답게 만드는 경계면으로, 한번 이 선을 넘어가면 그 무엇도, 심지어 우주에서 가장 빠른 빛조차도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건의 지평선은 탈출 속도가 빛의 속도(c)를 초과하는 지점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사건의 지평선은 물리적인 표면이 아니라 시공간 자체의 기하학적 경계입니다. 외부에서는 물질이나 빛이 안쪽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지만, 내부로 들어간 순간 외부 세계와의 인과적 연결은 영원히 끊어집니다. 즉, 사건의 지평선 안쪽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event)'도 그 경계 너머, 즉 외부 우주에 있는 관찰자에게는 어떠한 정보도 전달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니, 정말일까요?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 사건의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물체는 매우 기묘하게 행동합니다. 물체는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고, 방출하는 빛은 파장이 길어져 붉게 변하며(중력 적색편이), 결국에는 지평선 바로 위에서 영원히 멈춘 것처럼 희미해져 사라집니다. 이는 블랙홀의 강한 중력에 의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효과(시간 지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지평선을 통과하는 물체나 관찰자 자신은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평소처럼 경계를 통과하게 됩니다.
사건의 지평선의 크기는 블랙홀의 질량에 의해 결정됩니다. 회전하지 않는 가장 간단한 블랙홀(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의 경우, 사건의 지평선은 구형이며 그 반지름을 '슈바르츠실트 반지름(Rs)'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Rs=c22GM 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주어지며, 여기서 G는 중력 상수, M은 블랙홀의 질량, c는 빛의 속도입니다. 회전하는 블랙홀(커 블랙홀)의 경우, 사건의 지평선은 회전축 방향으로 납작해진 타원체 모양을 가지며 구조가 더 복잡해집니다.
사건의 지평선 자체는 빛을 내지 않기 때문에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은 사건의 지평선 바로 바깥에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물질들이 형성하는 밝은 '강착 원반(accretion disk)'이나, 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빛이 휘는 '중력 렌즈 효과', 그리고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 EHT) 프로젝트를 통해 관측된 블랙홀의 '그림자(shadow)'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존재와 영향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지평선은 단순히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우주 내에서 우리가 정보를 얻고 소통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설정합니다. 블랙홀은 마치 우주 안에 존재하는, 외부에서는 결코 열어볼 수 없는 '닫힌 상자'와 같습니다. 지평선 너머는 존재하지만 영원히 알 수 없는 영역이며, 이는 우주와 지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2.3. 모든 것이 붕괴하는 지점: 특이점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하는 블랙홀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바로 그 중심부에 위치한 '특이점(singularity)'입니다. 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을 형성한 모든 물질은 사건의 지평선 안쪽으로 계속해서 수축하여 결국 부피가 0인 하나의 점(또는 회전하는 경우 고리 모양)으로 압축됩니다. 이 지점에서는 물질의 밀도와 시공간의 곡률이 수학적으로 무한대(∞)가 됩니다. 정말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뭉개질 수 있을까요?
특이점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 장 방정식(Rμν−21gμνR=c48πGTμν)의 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이 방정식은 물질과 에너지(Tμν)가 시공간의 기하학(곡률, Rμν,R)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기술하는데, 블랙홀의 극단적인 중력 조건 하에서는 시공간 곡률이 무한대로 발산하는 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한 슈바르츠실트 해(회전하지 않고 전하가 없는 블랙홀)에서는 중심에 점 특이점이 나타나고, 회전하는 커 해에서는 고리 모양의 특이점이 나타납니다. 수학적으로 특이점은 시공간의 경로(측지선)가 유한한 시간 안에 끝나버리는 '측지선 불완전성(geodesic incompleteness)'이나, 시공간 곡률을 나타내는 스칼라 값이 무한대로 발산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특이점은 사건의 지평선 안쪽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어 외부 우주에서는 직접 관측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주 검열 가설(cosmic censorship hypothesis)'이라고 불리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는 추측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특이점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놀라운 예측인 동시에, 이론 자체가 가진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무한대의 밀도와 곡률은 물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우며, 이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특이점 근처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즉, 일반 상대성 이론은 자신의 방정식을 충실히 따라감으로써 결국 스스로 '나는 여기서 끝난다'고 선언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는 특이점이 단순한 수학적 기교가 아니라, 더 깊은 물리 이론의 필요성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임을 의미합니다.
3. 무한대의 공포: 왜 특이점은 물리학의 위기인가?
블랙홀 중심의 특이점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 현대 물리학의 근본적인 위기를 상징합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하는 무한한 밀도와 시공간 곡률은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특이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물리 법칙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밀도와 곡률이 무한대가 된다는 것은 시공간 자체가 그 지점에서 붕괴하며, 우리가 아는 모든 물리 법칙(일반 상대성 이론 포함)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지도에서 길이 끊겨 더 이상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인슈타인 자신조차 처음에는 블랙홀과 특이점의 물리적 실재를 의심했을 정도로, 무한대는 물리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이러한 이론의 붕괴는 과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예측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입니다. 과학은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물리 법칙을 통해 미래의 상태를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물체가 특이점에 도달한다면, 그 이후의 운명은 현재의 물리 법칙으로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자유 낙하하는 입자의 경로인 측지선(geodesic)은 특이점에서 끝나버립니다. 이는 우주 안에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함을 의미하며, 우리의 우주 이해에 심각한 공백을 만듭니다. 로저 펜로즈가 제안한 '우주 검열 가설'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특이점이 사건의 지평선 뒤에 숨겨져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예측 불가능성이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특이점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벌거숭이 특이점(naked singularity)', 즉 사건의 지평선 없이 외부에 노출된 특이점이 존재한다면, 이는 물리학에 훨씬 더 심각한 혼란을 야기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예측하려는 과학에게 예측 불가능한 지점이란 얼마나 큰 위협일까요?
특이점 문제는 블랙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주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빅뱅(Big Bang) 역시 초기 상태가 무한한 밀도와 온도를 가진 특이점으로 기술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재 이론으로는 빅뱅의 가장 초기 순간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특이점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성공적인 이론이 스스로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지점입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블랙홀의 심장부와 우주의 기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리 이론이 필요합니다. 특이점은 극도로 작은 규모(양자 역학의 영역)에서 극도로 강한 중력(일반 상대성 이론의 영역)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시 세계를 지배하는 중력 이론과 미시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 역학을 통합하는 궁극의 이론, 즉 '양자 중력(Quantum Gravity) 이론'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특이점의 존재는 양자 중력 이론의 탐구가 단순한 이론적 호기심을 넘어, 우주의 가장 극단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임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4. 양자 중력 후보들: 블랙홀 내부를 새로 그리다 - 무한대를 넘어선 상상력
일반 상대성 이론의 특이점이라는 벽에 부딪힌 물리학자들은 중력을 양자 역학적으로 기술하는 '양자 중력 이론'을 통해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아직 완성된 이론은 없지만, 여러 유망한 후보들이 블랙홀 내부의 모습을 새롭게 그리고 있습니다. 과연 양자 세계의 법칙은 블랙홀의 심장을 어떻게 바꿀까요?
4.1. 거인들의 만남: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통합
양자 중력 이론을 만드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가장 큰 도전 과제 중 하나입니다. 20세기를 지배한 두 개의 혁명적인 이론, 즉 거시 세계의 중력을 설명하는 일반 상대성 이론과 미시 세계의 입자들을 설명하는 양자 역학은 각자의 영역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둘을 하나의 틀 안에서 통합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중력을 시공간 자체의 기하학적 속성으로 다루는 반면, 양자 역학은 보통 고정된 시공간 배경 위에서 입자들의 행동을 기술한다는 점입니다. 양자 중력 이론은 시공간 자체가 양자화되는 방식을 설명해야 하며, 이는 '배경 독립성(background independence)'이라는 어려운 개념적, 기술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특이점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 즉 매우 작은 플랑크 길이(≈1.6×10−35 m) 규모에서 매우 강한 중력이 작용하는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력의 양자 효과를 고려해야 합니다. 양자 중력 이론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대체하거나 보완하여, 특이점 문제를 해결하고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4.2. 끈 이론의 제안: 퍼지볼과 사라진 특이점
양자 중력의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는 끈 이론(String Theory)입니다. 끈 이론은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가 점 입자가 아니라 미세하게 진동하는 '끈(string)'이라고 가정합니다. 끈의 다양한 진동 모드가 서로 다른 입자(전자, 쿼크, 광자, 중력자 등)로 나타나며, 이를 통해 중력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힘과 물질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려는 야심찬 이론입니다.
끈 이론의 관점에서 블랙홀을 보면, 고전적인 특이점 그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퍼지볼(Fuzzball) 제안'이라고 불리는 아이디어에 따르면, 블랙홀의 미시 상태(블랙홀을 구성하는 가능한 모든 양자 상태)는 중심에 특이점을 가진 매끄러운 시공간이 아니라, 사건의 지평선 크기만큼 퍼져 있는 복잡한 양자 구조물, 즉 '퍼지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이 퍼지볼은 끈과 브레인(brane, 끈 이론에 등장하는 고차원 막)들의 복잡한 얽힘 상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확한 경계나 내부의 빈 공간 없이 전체가 양자적인 '솜털 뭉치(fuzz)'처럼 채워져 있다고 묘사됩니다. 블랙홀이 텅 빈 구멍이 아니라 솜털 뭉치 같다니,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퍼지볼 그림에서는 블랙홀 중심에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블랙홀의 정보는 퍼지볼의 복잡한 구조 자체에 저장되어 있다고 봅니다. 또한, 퍼지볼은 미세한 표면 구조를 가지므로, 열복사(호킹 복사)를 통해 정보를 외부로 방출할 수 있어 정보 역설도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특정 종류의 블랙홀(주로 초대칭성을 가진 BPS 블랙홀)에 대해서는 끈 이론 계산을 통해 퍼지볼 상태의 수를 세어 블랙홀의 엔트로피(정보량의 척도)와 일치함을 보이는 성공적인 결과들이 있었습니다.
끈 이론의 다른 접근 방식에서는 고차항 보정(α' 보정, 끈의 유한한 크기 효과와 관련됨)을 통해 블랙홀 특이점이 제거되고 매끄러운 시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퍼지볼 제안은 아직 완성된 이론이 아니며, 몇 가지 중요한 질문과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우주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블랙홀(슈바르츠실트 블랙홀 등)에 대한 완전한 퍼지볼 묘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한, 퍼지볼이 정말로 모든 블랙홀 미시 상태를 대표할 수 있는지, 아니면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논쟁도 있습니다. 끈 이론 자체가 현재로서는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매우 어렵다는 근본적인 한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4.3. 루프 양자 중력: 시공간의 알갱이
또 다른 주요 양자 중력 후보는 루프 양자 중력(Loop Quantum Gravity, LQG)입니다. LQG는 끈 이론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여, 일반 상대성 이론을 직접 양자화하려고 시도합니다. 특히 시공간 자체의 양자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며, '배경 독립성'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습니다.
LQG의 가장 흥미로운 예측 중 하나는 시공간이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구조, 즉 '알갱이(granule)'나 '원자(atom)'와 같은 이산적인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면적이나 부피와 같은 기하학적 양들이 최소 단위를 가지며 양자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공간이 쪼개질 수 있다면, 무한한 압축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시공간의 양자적 구조는 특이점 문제를 해결하는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을 제공합니다. LQG 계산에 따르면, 블랙홀 중심으로 물질이 붕괴하더라도 시공간의 최소 단위 때문에 무한히 작은 점으로 수축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극도로 압축된 상태에서 양자 효과가 강력해져 붕괴가 멈추고 다시 팽창하는 '양자 바운스(quantum bounce)'가 일어나거나, 특이점이 유한한 크기와 밀도를 가진 '양자 핵(quantum core)' 또는 '전이 표면(transition surface)'으로 대체됩니다. 일부 모델에서는 이 전이 표면을 통해 블랙홀 내부가 과거의 블랙홀(수축 영역)과 미래의 화이트홀(팽창 영역)을 연결하는 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고 예측합니다.
LQG 연구자들은 다양한 블랙홀 모델(예: Ashtekar-Olmedo-Singh (AOS) 모델)을 개발하여 특이점 없는 내부 구조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자 효과는 블랙홀 내부에 국한되지 않고, 외부 시공간에도 미세한 흔적을 남길 수 있으며, 예를 들어 블랙홀이 외부 조석력에 반응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조석 러브 수(Tidal Love Number)' 측정을 통해 이론적으로 검증될 가능성도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LQG 역시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이론의 동역학(시간에 따른 변화) 부분이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으며, 거시적인 규모에서 고전적인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어떻게 정확히 일치하는지를 보이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4.4. 비교: 특이점 없는 블랙홀의 다양한 모습
양자 중력 후보 이론들은 공통적으로 일반 상대성 이론의 특이점을 제거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방식과 결과적으로 예측하는 블랙홀 내부의 모습은 매우 다양합니다.
- 끈 이론은 퍼지볼과 같이 블랙홀 미시 상태가 확장된 양자 구조를 가질 수 있다고 제안하며, 이는 물질의 기본 속성(끈)이 특이점 형성을 막는다는 관점을 반영합니다.
- 루프 양자 중력은 시공간 자체의 양자적 불연속성 때문에 특이점이 형성되지 않고 양자 바운스나 유한한 크기의 양자 핵으로 대체된다고 보며, 이는 시공간의 근본 구조가 특이점을 막는다는 관점을 보여줍니다.
- 이 외에도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정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 방정식에 고차 미분항을 추가하여 중력 법칙 자체를 수정함으로써 특이점 없는 '규칙적인 블랙홀(Regular Black Holes)'해를 얻으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델에서는 블랙홀 중심이 매우 높은 곡률을 가지지만 유한한 정적 영역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그라바스타(Gravastar)' 가설은 특이점 대신 암흑 에너지로 채워진 내부를 제안하고, '플랑크 별(Planck Star)' 가설은 물질이 플랑크 밀도에 도달하면 더 이상 붕괴하지 않고 튕겨 나간다고 주장합니다.
아래 표는 주요 이론들이 예측하는 블랙홀 중심부의 모습을 비교한 것입니다.
특징 (Feature)**일반 상대성 이론 (General Relativity)끈 이론 (String Theory - e.g., Fuzzball)루프 양자 중력 (Loop Quantum Gravity)**기타 수정 이론 (e.g., Regular BH)
중심부 (Center) | 특이점 (무한 밀도/곡률) | 특이점 없음 (퍼지볼 구조) | 특이점 없음 (양자 바운스/핵) | 특이점 없음 (정규 영역) |
---|---|---|---|---|
자연 (Nature) | 점/고리 | 확장된 양자 상태 | 이산적 양자 기하 | 유한 곡률의 시공간 |
사건의 지평선 (Horizon) | 매끄러운 경계 | 퍼지/구조화된 경계? | 양자적으로 수정된 경계? | 고전적 경계와 유사할 수 있음 |
정보 역설 (Info Paradox) | 문제 발생 | 해결됨 (정보 표면 저장) | 해결 가능성 (정보 탈출?) | 모델에 따라 다름 |
이처럼 특이점을 제거하는 다양한 방식들은 각 이론이 가정하는 시공간과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에 대한 서로 다른 철학적 입장을 반영합니다. 특이점 해결책은 단순히 수학적 무한대를 없애는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각 이론이 그리는 우주의 근본적인 모습, 즉 세계관을 보여주는 창과 같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다양한 특이점 해결책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블랙홀 중심에 '정보'가 존재하고 처리될 수 있는 유한한 물리적 공간이나 구조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부피 0인 특이점과 달리, 퍼지볼, 양자 핵, 정규 영역 등은 모두 정보가 저장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를 가정합니다. 이는 뒤이어 살펴볼 블랙홀 정보 역설의 해결 가능성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특이점을 제거하는 것은 정보가 존재할 '장소'를 마련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5. 사라진 정보의 행방: 블랙홀 정보 역설 - 우주의 비밀은 지워지지 않는다?
블랙홀의 가장 깊은 미스터리 중 하나는 '정보 역설(information paradox)'입니다. 이는 블랙홀이 단순히 물질을 삼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역학적 효과에 의해 서서히 증발한다는 스티븐 호킹의 발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5.1. 호킹의 폭탄 선언: 블랙홀은 증발한다
1974년, 스티븐 호킹은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결합한 준고전적(semi-classical) 계산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블랙홀이 완전히 검은 것이 아니라, 미세한 열복사(thermal radiation)를 방출하며 서서히 에너지를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 복사를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라고 부릅니다. 블랙홀이 빛을 낸다고요?
호킹 복사는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바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양자 요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양자 진공에서는 끊임없이 입자와 반입자 쌍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데, 지평선 근처에서 생성된 쌍 중 하나는 블랙홀 안으로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외부로 탈출하는 입자가 바로 호킹 복사이며, 이 과정에서 블랙홀은 에너지를 잃게 됩니다 (음의 에너지를 가진 입자가 블랙홀로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호킹 복사는 매우 미약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블랙홀은 점진적으로 질량을 잃게 됩니다. 블랙홀의 온도는 질량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질량이 작아질수록 더 뜨거워지고 더 빠르게 복사를 방출합니다. 결국,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나면 블랙홀은 모든 질량을 복사 에너지로 방출하고 완전히 증발하여 사라질 것으로 예측됩니다.
5.2. 역설의 탄생: 정보는 어디로 갔는가?
호킹의 발견은 블랙홀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꾸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바로 정보 역설입니다.
양자 역학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 중 하나는 '유니터리성(unitarity)'입니다. 이는 양자 상태의 시간 변화가 항상 가역적(reversible)이며, 정보가 절대 소멸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초기 상태에 대한 완전한 정보가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도 그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하며, 반대로 미래 상태로부터 초기 상태를 복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순수한 양자 상태(정보가 완전히 알려진 상태)는 시간이 지나도 항상 순수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하며, 정보가 일부 손실된 혼합 상태(mixed state)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호킹의 계산에 따르면, 호킹 복사는 방출되는 입자들이 서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완벽한 열복사(thermal radiation)의 형태를 띱니다. 이는 호킹 복사가 블랙홀을 형성한 초기 물질의 구체적인 정보(예: 어떤 종류의 입자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양자 상태였는지 등)를 전혀 담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하고 나면, 초기 물질의 정보는 호킹 복사에도 남아있지 않고 블랙홀 자체도 사라졌으므로, 정보가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양자 역학의 유니터리성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우주의 법칙이 서로 싸우고 있다면,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블랙홀은 질량, 전하, 각운동량이라는 세 가지 거시적인 양 외에는 다른 세부 정보를 외부에서 알 수 없다는 '털 없음 정리(No-Hair Theorem)' 역시 이 역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블랙홀이 형성될 때 초기 물질의 복잡한 정보는 이 세 가지 양으로 단순화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보 역설은 일반 상대성 이론(블랙홀 형성 및 증발 예측)과 양자 역학(정보 보존 원리)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이 서로 모순되는 예측을 내놓는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냈습니다.
5.3. 해결을 향한 여정: 퍼지볼, 섬, 그리고 웜홀 - 사라진 정보를 찾는 기상천외한 방법들
정보 역설은 지난 50년간 이론 물리학자들에게 큰 숙제를 안겨주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제안되었습니다. 해결책들은 크게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또는 가지 않는지)에 따라 분류될 수 있습니다.
- 정보 손실 수용: 호킹의 초기 입장처럼, 블랙홀 증발 과정에서 정보는 정말로 손실되며, 양자 역학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에너지 보존 법칙 위반 등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현재 소수 의견으로 남아있습니다.
- 호킹 복사에 정보 인코딩: 호킹 복사가 완벽한 열복사가 아니라, 초기 정보가 미묘한 양자 상관관계 속에 숨겨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작은 보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 블랙홀 잔여물: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하지 않고 플랑크 크기의 안정된 '잔여물(remnant)'을 남겨 정보가 그 안에 저장된다는 가설입니다. 하지만 작은 잔여물이 어떻게 거대한 블랙홀의 막대한 정보를 모두 담을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 퍼지볼 제안: 앞서 언급했듯이, 블랙홀 자체가 특이점 없는 퍼지볼 구조이며, 정보가 이 구조에 저장되어 호킹 복사를 통해 방출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 AdS/CFT 대응과 최신 아이디어 (섬, 레플리카 웜홀): 최근 가장 활발히 연구되는 방향입니다.
- AdS/CFT 대응: 특정 시공간(반-드지터 공간, AdS)에서의 중력 이론이 그 경계면에 존재하는 양자장론(CFT)과 수학적으로 동등하다는 가설입니다. 경계의 CFT는 유니터리하므로, 대응되는 중력 이론(블랙홀 포함)에서도 정보는 보존되어야 합니다.
- 페이지 곡선(Page Curve): 정보가 보존된다면, 블랙홀이 증발함에 따라 방출되는 호킹 복사의 얽힘 엔트로피는 처음에는 증가하다가 블랙홀이 절반 정도 증발한 시점(페이지 시간) 이후로는 다시 감소해야 합니다. 이 예상되는 엔트로피 변화 곡선을 페이지 곡선이라고 합니다.
- 양자 극단 표면과 섬(Island): 페이지 곡선을 재현하기 위한 계산에서, 호킹 복사의 엔트로피를 구할 때 블랙홀 '내부'의 특정 영역, 즉 '섬(island)'을 외부 복사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는 블랙홀 내부의 정보가 외부 복사와 깊게 얽혀 있으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섬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까지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 블랙홀 안의 정보가 바깥과 연결되어 있다고요?
- 레플리카 웜홀(Replica Wormhole): '섬'을 포함한 엔트로피 계산은 '레플리카 트릭'이라는 수학적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 복제본(replica)들을 연결하는 '시공간 웜홀' 기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레플리카 웜홀을 고려한 계산은 페이지 곡선을 성공적으로 재현하며 정보 역설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최신 연구 동향, 특히 '섬'과 '레플리카 웜홀'의 등장은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합니다. 이는 양자 중력에서 '비국소성(non-locality)' 또는 시공간 자체의 '얽힘(entanglement)'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블랙홀의 내부와 외부가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명확한 경계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 얽힘이나 웜홀과 같은 미묘한 연결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전적인 국소성 원리가 양자 중력의 세계에서는 수정되어야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며, 시공간과 정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보 역설 논쟁은 단순히 블랙홀 물리학의 문제를 넘어, 양자 정보 이론(얽힘, 엔트로피, 양자 오류 수정 코드), 계산 복잡성 이론, 그리고 우주론 등 현대 물리학의 다양한 최전선 분야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역설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이들 분야 간의 융합을 촉진하고 이론 물리학 전체의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6. SF인가 과학인가: 웜홀과 다른 우주로의 문? - 블랙홀이 지름길일 수 있을까?
블랙홀의 기묘한 성질은 오랫동안 공상 과학 소설 작가들과 과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습니다. 특히 블랙홀 내부가 시공간의 다른 지점이나 심지어 다른 우주로 연결되는 '웜홀(wormhole)'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매우 매력적입니다.
웜홀은 이론적으로 시공간에 존재하는 가상의 지름길 또는 터널로, 멀리 떨어진 두 지점을 짧게 연결하거나 서로 다른 우주를 잇는 통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블랙홀과 웜홀은 둘 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극단적인 시공간 왜곡을 다룬다는 점에서 개념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특히 회전하는 블랙홀(커 블랙홀)의 중심에 있는 고리 모양의 특이점은 수학적으로 다른 시공간 영역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형성할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실제로 웜홀을 통과하여 여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틀 내에서 안정적이고 통과 가능한(traversable) 웜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이 물질(exotic matter)'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입니다. 이 물질은 음의 에너지 밀도 또는 음의 압력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물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기묘한 성질입니다. 널 에너지 조건(Null Energy Condition)과 같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에너지 조건을 위반해야 웜홀의 입구가 중력으로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의 에너지를 가진 물질이라니, 정말 존재할까요?
일부 이론가들은 양자 역학적 효과, 예를 들어 카시미르 효과(Casimir effect)가 국소적으로 음의 에너지 밀도를 만들어 특이 물질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정한 일부 이론(예: 특정 스칼라-텐서 이론)에서는 특이 물질 없이도 웜홀 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최근에는 아인슈타인 중력에 특정 스칼라 장들을 결합하여 블랙홀 내부에 웜홀 구조를 숨기거나, 하나의 매개변수를 조절하여 블랙홀과 웜홀 사이를 연속적으로 변화시키는 정규 시공간 모델(예: 심슨-비서 모델) 등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웜홀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관측 증거는 없습니다. 웜홀은 블랙홀과 유사한 관측적 특징(예: 주변 빛의 왜곡, 그림자 형성 가능성)을 보일 수 있어 둘을 구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이나 중력파 관측 등을 통해 블랙홀과 웜홀(또는 다른 블랙홀 모방 천체)을 구별할 수 있는 미묘한 신호 차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건의 지평선이 없는 블랙홀 유사 천체의 증거가 발견된다면, 이는 블랙홀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과 일반 상대성 이론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웜홀 탐색은 단순히 공상 과학적 상상을 쫓는 것을 넘어, 일반 상대성 이론과 블랙홀 패러다임을 극한 환경에서 검증하는 중요한 과학적 활동입니다.
웜홀 연구는 또한 '중력과 시공간 위상(topology)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하게 합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주로 시공간의 기하학(휘어짐)을 다루지만, 웜홀은 시공간의 연결성(위상) 자체가 변하는 문제입니다. 웜홀의 존재 가능성은 중력 이론이 시공간의 위상 변화까지도 설명해야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며, 이는 양자 중력 이론에서 시공간 위상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정보 역설 해결 과정에서 등장한 '레플리카 웜홀'은 이름에 웜홀이 들어가지만, 이는 엔트로피 계산을 위한 수학적 구성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 통과 가능한 거시적 웜홀과는 다른 개념일 수 있습니다. 웜홀이 이론적으로 시간 여행(닫힌 시간꼴 곡선 생성)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인과율 파괴와 같은 심각한 역설 문제를 안고 있어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블랙홀 내부가 웜홀로 이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매우 추측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탐구는 중력과 시공간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기존 이론의 한계를 시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7. 결론: 지식의 최전선에서 던지는 질문들 -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었고,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블랙홀 내부, 그곳은 여전히 인류 지식의 최전선에 놓인 거대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블랙홀의 존재를 예측하고 그 외부 구조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블랙홀의 심장부인 특이점에서는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이 무한대의 문제는 단순한 수학적 골칫거리가 아니라, 우주의 가장 극단적인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리학, 즉 양자 중력 이론이 필수적임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였습니다.
끈 이론의 퍼지볼, 루프 양자 중력의 양자 바운스, 그리고 다양한 수정 중력 이론들이 제시하는 규칙적인 블랙홀 등, 양자 중력 후보들은 특이점 없는 블랙홀 내부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블랙홀 정보 역설이라는 또 다른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하며, 정보가 블랙홀 증발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최근 '섬'과 '레플리카 웜홀'을 이용한 계산은 정보가 보존되는 페이지 곡선을 재현하며 큰 주목을 받았지만, 그 물리적 해석에 대해서는 여전히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 어떤 양자 중력 이론이 자연을 올바르게 기술하는지, 블랙홀 내부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각각의 이론들은 저마다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론적 불확실성 속에서 관측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EHT)은 인류 최초로 블랙홀의 그림자를 포착하여 사건의 지평선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확인시켜 주었고, LIGO와 Virgo같은 중력파 검출기는 블랙홀들의 충돌과 병합이라는 경이로운 현상을 직접 감지하여 강한 중력 영역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는 새로운 창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관측 기술의 발전은 이론 물리학자들에게 귀중한 데이터를 제공하며, 일반 상대성 이론의 미세한 편차를 찾아내거나 대안 중력 이론들을 시험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행성의 정밀한 궤도 측정과 같은 고전적인 방법들 역시 여전히 중요한 검증 수단입니다. 블랙홀 연구의 역사는 이처럼 이론과 관측이 서로를 이끌고 검증하며 발전해 온 과학적 탐구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론적 예측이 수십 년 후 관측으로 확인되고, 그 관측 결과가 다시 새로운 이론의 발전을 촉진하는 선순환 구조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블랙홀 내부를 이해하려는 여정은 단순히 하나의 천체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시공간의 본질, 정보의 운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주를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밝히려는 인류의 지적 모험입니다. 블랙홀은 또한 '시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예측되는 블랙홀 내부의 시간과 공간의 뒤바뀜, 그리고 정보 역설 해결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시간 진화의 가역성 등은 블랙홀이 시간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도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함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블랙홀 안으로 떨어지면 정말 스파게티처럼 늘어날까? 특이점은 정말 존재하지 않을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블랙홀에 삼켜진 정보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고 다시 나타나는 걸까? 블랙홀이 정말 다른 우주나 시공간의 다른 지점으로 통하는 문, 웜홀일 가능성은 없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아직 미지의 영역에 남아있지만, 전 세계의 물리학자들은 이론과 관측, 실험을 통해 그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블랙홀이라는 우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근원을 이해하려는 여정이며, 앞으로도 놀라운 발견과 함께 우리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참고 문헌
- 블랙홀 - 나무위키 (Black hole general concepts)
- 사건의 지평선 - 위키백과 (Event horizon definition and properties)
- KIAS Horizon: 블랙홀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General Relativity, Singularity, Schwarzschild solution)
- 중력 특이점 - 위키백과 (Gravitational singularity definition, types, and problems in GR)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ingularities and Black Holes (Conceptual problems of singularities, need for quantum gravity)
- 물리학과 첨단기술: 블랙홀 정보손실문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Review of the information paradox and proposed solutions like complementarity, AdS/CFT)
- 블랙홀 정보 역설 - 위키백과 (Overview of the information paradox and solutions including Fuzzball proposal)
- arXiv:0810.4525 - Fuzzballs and the information paradox: a summary and conjectures (Detailed review of the Fuzzball proposal)
- arXiv:2501.09151 - Loop Quantum Gravitational Signatures via Love Numbers (Recent LQG model (AOS) resolving singularity and its potential observational signatures)
- arXiv:1911.11977 - Replica wormholes and the black hole interior (Key paper on replica wormholes and their role in resolving the information paradox / calculating the Page cu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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